[글마당] 싱글인 줄 알았는데
사람의 머릿속은 그 사람이 일상적으로 들고 다니는 가방 속과 그 사람이 사는 집안 구조와 같다고 한다. 오래전, 겨울이 끝나가는 화창한 날 그녀의 전화를 받았다. 반가웠다. 중요한 서류를 룸메이트가 뒤질까 봐 몽땅 들고 다니는 그녀가 또 그 무거운 주홍색 백팩을 메고 나올까?‘ 궁금했다. 맨해튼 다운타운 워싱턴 스퀘어에서 만났다. 나는 봄볕에 달구어진 벤치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멀리서 주홍색이 세월의 때가 묻어 갈색이 된 백팩을 메고 구부정하게 걸어오는 그녀를 금방 알아봤다. 그녀는 가방이 안전하고 편하도록 벤치에 기대놓고 자신은 의자 끝에 히프를 살짝 얹은 불편한 자세를 취하더니 쑥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백팩이 지난번 만났을 때보다 더 커진 것 같아요.” “무게는 별반 달라진 것이 없는데, 남편과 이혼한 서류를 넣었더니.” “결혼했었어요? 나는 싱글인 줄 알았는데.” “먹고 살길이 막막해서 어린 나이에 한국에 파견된 미군과 결혼하고 조지아로 왔어요. 미국 하면 화려하고 좋은 줄만 알았지 그렇게 깡 시골에 많은 식구와 일가친척이 모여 사는 줄은 몰랐어요. 남편은 술만 마시면 얼굴값 하는 화냥년이라며 저를 두들겨 패기 일쑤였어요. 그곳에서 버티다가는 죽겠구나 싶어 뉴욕으로 도망 왔지요. 보시다시피 제 얼굴이 조금 반반하지 않나요?” 얼굴에 여드름 자국이 드문드문 있긴 하지만, 흰 피부, 짙은 쌍꺼풀 눈, 적당히 솟아오른 코, 뚜렷한 인중 밑에 얇은 입술은 말할 때 떨리는 듯했다. 꾸미지 않고 뒤로 질끈 묶은 머리털은 거칠었다. 짊어진 커다란 가방에서 시선만 떼고 자세히 관찰했다며 예쁜 얼굴임을 알아봤을 것이다. 몸매 또한 옷만 제대로 걸치고 돌덩어리 같은 주홍색 백팩 없이 똑바로 섰더라면 팔다리가 길고 균형 잡힌 체형이다. 허스키 목소리는 쾌활하게 톤을 높였다가 금방 축 처지는 공허한 낮은 소리로 일관성 없이 수시로 변했다. 그녀의 기분 또한 각양각색으로 나타났다. 말을 멈추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눈여겨보는가 하면 불안한 자세로 몸을 웅크리고 뭔가 두려운 듯 두리번거렸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깜빡했다는 얼빠진 표정의 씁쓸한 미소로 허리를 펴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마 자신의 지난 삶을 뒤돌아본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닌가 보다. “이혼을 해주지 않아 미루다가 그간 수없이 많은 서류가 오가면서 드디어 얼마 전에 서류 정리가 끝났어요.” 이혼으로 그녀의 몸과 마음은 홀가분하고 가벼워진 듯 미래에 대한 희망에 들떠 있었다. 그녀의 등에 업혀 바래고 피곤해져 갈색조로 변해가는 백팩이 마치 생명체를 띄며 이제는 그만 그녀의 등에서 내려서 쉬고 싶다고 진지하고 묵직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듯했다. 이수임 / 화가·맨해튼글마당 싱글 주홍색 백팩 허스키 목소리 서류 정리